끄적거리기
어색한 대화
그을곰
2009. 8. 22. 00:00
어색한 대화
강신행
“저는 카페모카요.”
“휘핑크림 얹어드릴까요?”
“네”
“아, 저는 녹차라떼요”
사실 이 남자를 여기서 본다는 게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결국 이 남자와 함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숍의,
제일 좋아하는 자리에 같이 앉았다.
그녀의 자리에 네가 앉아있어. 알아?
그리고 녹차라떼라니. 그런 역겨운 걸 어떻게 먹는지…
“이렇게 갑자기 뵙자고 해서 죄송해요”
죄송할 짓을 왜하는데?
“별말씀을…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그녀와 헤어진 이유를 알고 싶어서요”
이건 왠 개소리…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
“네?”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장난하냐? 무슨 호기심천국이냐...
“왜? 헤어지고 싶으신데 이유가 필요하신 건가요?”
“아니요. 곧 갈등의 순간이 올 것같은데, 그 전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놓으려고요. 한번에 무너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 인간관계잖아요”
그래, 당신 말대로 우리는 한번에 무너져내렸지.
아 귀찮아. 생각하기가 너무나 귀찮다.
“글쎄요. 성격 차이였던 것같아요”
“하하, 그런 뻔한 대답말고요.”
발끈.
“그런데, 제가 왜 그런 것까지 대답을 해드려야 하는거죠?”
“기분을 상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왠지 도와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이렇게 커피가 쓴지. 코코아 가루를 넣은다음에 제대로 안 저은 것이 분명하다.
단골 커피숍을 옮기든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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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아직도 너에게 내가 필요하냐?”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도 내가 필요하냐고 너에게. 아니 단 한 순간이라도 내가 너에게 필요했던 적이 있었어?”
“사람을 필요성으로 만나는 것은 아니잖아.”
“말돌리지 마. 난 네가 정말 필요해서 만나는거야.”
“…”
“넌 내가 안 필요하구나”
“너를 보면 좋아. 너랑 함께 있으면 즐겁고. 너는 유쾌한 아이잖아”
“하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그렇지?”
“…”
“그럼 헤어져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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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이야기입니다. 그 녀석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다른 이유가 있으셨던 것 아닌가요?”
“아니요. 그 녀석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었어요. 그 때에는 한 끝의 양심이 남아있었던가봐요.”
“그렇군요… 새로운 여자친구분이 얘보다 더 좋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끈질긴 놈.
“딱히… 그냥 질린거죠. 똑같은 얼굴, 똑같은 옷, 똑같은 대화”
그리고 똑같은 커피.
“음…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될까요?”
강한 것을 물어보려나…
“사랑했었죠? 그래도?”
“무슨… 그 땐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사랑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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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으로 나왔던 그 말.
“사랑한다”
“응?”
놀란 표정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하긴 입 밖으로 뱉은 나조차도 소스라치게 놀란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와서 어쩌겠냐.
“사랑한다고”
“응, 그래.”
“야, 보통 사랑한다고 하면 대답은 좀더 세련되어야 하는거 아니야?”
“그런게 어딨어??”
“너는 나 사랑하냐?”
“난 아직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 많이 좋아하면 사랑하는건가?”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면”
“뭐야, 너도 잘 모르면서 그렇게 섣부르게 사랑한다고 말하는거야?”
“잘 모르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실재한다면 내가 지금 너에게 느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푸우. 말은 정말 잘해요.”
“그러니까 너는?”
“아 모른다고. 정말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되면 그 때 말해줄께.”
“사랑한단 말 한번 듣기 정말 힘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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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잘 들었습니다.”
별로 도움이 안 되었겠지.
“자 그럼 일어나시죠”
내가 일어나서 가방을 챙기는 도중에도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다보니 녹차라떼에는 전혀 입을 대지도 않은 상태였다. 다시 한번 물었다.
“가시죠”
그 때 그의 비명과도 같은 짧은 한 마디.
“그녀를 잘 모르겠어요.”
“네?”
“제가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재밌는 일을 함께 해도, 그 애는 도무지 웃을 줄을 몰라요. 심지어 그애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조금도 미소를 띄워주지 않아요”
당신은 그녀의 사랑한다는 말을 그래도 들어봤잖아.
“…”
“모르겠어요.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같아요. 제 억지로 그녀를 붙잡아 두고 있는 것같아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여어. 그나저나 아직까지도 여러사람 힘들게 하고 다니는구나. 너.
“그래서요?”
“네?”
“그러면 헤어지시면 되잖아요.”
“하지만 전 그녀를 너무 사랑하거든요. 제 옆에 그녀가 없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머리털이 쭈뼛쭈뼛서면서 소름이 끼쳐요”
미친 놈. 자꾸 일어서 있는 상태로 계속 말을 하려니 짜증만 난다.
“아니요. 걘 당신을 정말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한테는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도 없고,
나한테는 내가 필요하다는 말을 해준 적도 없으니까.
그 말을 한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한번 말한 적이 있어요. 헤어짐에 대해서. 그러자 그녀는 제가 정말로 필요하다며, 사랑한다며 헤어지지 말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말뿐인 것같아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 녀석의 얼굴을 때리고 말았다.
“야 이 자식아. 사랑한다고, 필요하다고 말해주면 됐지, 미소가, 그리고 진심이 뭐가 중요해. 미친 새끼… 빨리 돌아가서 잘못했다고 그래 병신아”
어리둥절해 하는 그를 뒤로 하고 다시 한대 얻어맞기 전에 자리를 떴다.
왜 흥분했는지 잘 모르겠다. 한심하게 쓸데없는 일에 나서다니… 커피가 진했나보다.
나도 저 녀석처럼 녹차라떼나 마실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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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와서 뒤척이다가 쓴 픽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