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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눈멂에 관하여 2009.03.08

눈멂에 관하여

from 끄적거리기 2009. 3. 8. 20:34
눈멂에 관하여

강신행
2009.3.7

들어가며

 2009년을 시작하면서 결심한 일 중에 하나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책을 읽는 것이었다. 대학생이 된 다음부터는 입버릇처럼 50대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겠다고 했었고, 정작 스웨덴에 와서는 친구에게 노벨 문학상 마크를 선물 받아 필통에 내내 달고 다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글들을 써왔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 의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흥미로운 책을 두 권 읽게 되었다. 바로 199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와 역시 2006년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받은 첫 느낌은 “쉽다”는 것이었다. 군대에서 신춘문예 입선한 사람들의 시를 찾아 읽으면서, 그리고 지난해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나서, 최종적으로 내가 내린 결론은 “문학상을 받으려면 심사위원들이 여러 가지 각도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렵도록 난해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간결하고 어떻게 보면 차갑기까지 한 핵심 사건들만 나열하는 식의 문체로는 100년을 노력해도 도저히 문학상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글을 난해하게 쓰는 사람들을 너무나 동경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내가 읽었던 바로 이 두 작품은 너무나 쉽게 쓰여져 있었다. 번역된 책이기에, 번역자의 어휘력과 문장력을 거쳐서 최초에는 어렵던 작품이 쉽게 탈바꿈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역시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책은 달랐다. 독자로 하여금 책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고, 이 시대와 공간에 던지는 질문이 뚜렷이 존재했다. 그 와중에 나는 두 작품에 있는 묘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했다. 두 작품 모두 시각의 상실이라는 소재를 활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한 작품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그리고 다른 한 작품에는 매우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의 눈멂 – 눈의 상실


“눈먼 자들의 도시”(이하 “도시”로 통칭한다)에서의 눈 멂은 처음부터 질병으로 시작한다. 한 시민이 백색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는 “백색실명 전염병”에 걸리게 되고, 그를 시작으로 그와 접촉한 사람은 모두 그 병에 걸려 실명한다. 그리고 결국 전세계인들이 실명한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단 한 사람의 여자만 빼고.
“빨강”은 리얼리즘의 극치이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명한 사람들은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없이 하던 기본적인 일조차도 할 수 없게 된다. 눈을 볼 수 없는 장애우들이 그래도 기본적인 생활 혹은 일을 할 수도 것은 눈이 보이는 가족들이나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명이 전염병이 되어 모두가 실명해 버린 “도시” 속에서는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가 없다. 그리고 다른 시력이 안 좋거나 거의 퇴화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시각 이외의 다른 감각을 훈련시켜 온 적이 없기에 그 어떤 때보다도 무력한 상황이다. 이 병 이전부터 원래 보지 못하던 사람들, 그래서 안 보이는 것에 익숙한 자들이 이제는 오히려 우위에 서는 양상도 “도시” 속에서는 나타난다.
또한 내가 볼 수 없음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다른 이들도 내가 하는 일을 볼 수 없음이다. 내가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다른 이들은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없고,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조차 인지할 수 없다. 그저 목소리나 다른 사소한 특징들을 기억함으로 간신히 다른 사람을 인식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번거롭게 화장실까지 가느니 그냥 복도에서 일을 보고, 무기를 들고 내 주위로 휘둘러서 식량을 약탈하고, 식량을 인질로 잡고 부녀자들을 강간한다. 
아무리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이런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었지만 곧 이런 내 생각이 짧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당신은 누구인가?”는 말이 있다. “도시”는 아무도 볼 수 없기에 모든 곳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들의 인격이 아닌 본능은 오히려 짐승보다 못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법과 규제가 없다면,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인간 세계는 이 작품 속에서처럼 이처럼 무력하게 무너져버린다. 
“도시” 안에서의 눈멂은 눈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그 결과는 지옥이다.

“내 이름은 빨강”에서의 눈멂 – 눈의 폐기



“내 이름은 빨강”(이하 “빨강”으로 통칭한다)에서의 눈멂은 이 작품의 주인공들인 세밀화가들의 최후의 소원이다. 내 생각에 음악가였던 베토벤에게 청력의 상실이 매우 치명적이었던 것처럼, 화가인 그들에게 시각의 상실은 그들이 사는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마치 불교에서 열반에 다다르는 것처럼, “빨강” 속의 세밀화가들에게 실명은 평생 동안 신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데 일생을 바친 화가들에게 신께서 주시는 마지막 행복이다.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지독한 자만과 신성모독의 표현이라고 여기는 그들은 원근법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화풍을 지극히 경멸한다. 어떻게 술탄이 개보다 작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생각하기에 “신의 눈”으로 본 세상은 귀한 것은 크고, 그리고 하찮은 것은 작다. 그러므로 술탄은 크게 그려지고 개는 작게 그려져야만 한다. 사람의 눈은 “신의 세계”을 그리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기억에 의지해 그림을 그리게 되는 행복한 눈멂의 시간”을 위해 그들은 손톱이며 쌀알, 심지어 머리카락에까지 그림을 그리거나 일부러 안 좋은 조명 속에서 일하면서 하루 빨리 장님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세밀화가 중 몇몇은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장님이 되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그 이유가 자신들의 재능이나 기예의 부족으로 여겨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일부러 장님 흉내를 내기도 한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가지 이야기들 중에서 이 가치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일화는 화원장 오스만이 스스로 바늘로 눈동자를 찔러 장님이 되는 장면이다. 그는 눈멂의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고대의 위대한 장인이 스스로 실명하기 위해서 썼던 바로 그 바늘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눈멂은 장애이자 결핍이지 “빨강”에서 말하는 것처럼 획득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받아들이는 시각신호들이 얼마나 우리의 생각을 분산시키는 생각해보자. 기도를 할 때 눈을 감는 것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뜬 눈으로는 보이는 것을 보기에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빨강”에서의 그 세밀화가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눈을 버린 것이다.
“빨강” 안에서의 눈멂은 눈을 버리는 것이고 그 결과는 신의 나라, 천국이다.

나에게 눈멂이란.

눈멂은 사실 내가 매일매일 체험하는 일 중에 하나이다. 하루에 고된 일과를 마치고, 책상과 침대를 정리한 후 불을 끄면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침대까지는 순전히 기억과 감에 의지해서 가야만 한다. 또한 내가 머물고 있는 기숙사의 자전거 보관실에 들어가면 나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물론 전등을 켤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꺼지기에 나같이 느릿느릿한 사람에게는 사실상 빛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때는 방에서 침대로 가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야만 한다.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벽에 부딪히지 않으려 해야 하고, 또 발로 바로 내 앞을 더듬어서 계단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면서 움직여야 한다. 계단이 있는 것은 분명히 알지만 어디서부터 계단이 시작되는지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눈멂은 확실히 나에게 곤혹스럽다. 
나이가 들면서 시각이 점점 약화됨을 느끼게 된다. 지금은 그런 증세가 많이 사라졌지만, 군대에서 밤에 공부를 할 때 글씨가 계속해서 흐릿하게 두 개로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서 정말 기겁을 했던 적이 있다. 바로 세면대로 가서 물로 눈을 씻어보기도 하고, 인공눈물을 넣기도 하며 두려움에 떨었었다. 어떻게 보면 시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은 실명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실명이란 여전히 나에게 공포다. 마치 높은 곳에서 지면을 향해 눈을 돌리면, 내 의지에 전혀 상관없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처럼, 실명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공포이다.

글을 닫으며

사실 호기롭게 시작한 글이었는데, 마무리를 지으면서 완성감과 보람보다는 난감함을 느낀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는 글이 되어버렸다는 좌절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멂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니까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가 잘 돕자” 는 식의 논리도 생각도 없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기로 한다. 하지만 대신에 이 글을 통해서 어떤 한 명의 독자라도 위의 책 “도시”나 “빨강” 들을 읽어봐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거나 스스로도 눈멂이란 어떤 것일지 잠시라도 생각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면 이 글은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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