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관하여'에 해당되는 글 119건
- 결혼비용 2013.08.13
- 블로깅을 못하게 된 나에게 2013.04.27
- 아홉수 2013.02.11
- 기억나는 일화 2013.02.09
군대에 있을 때는 가방에 작은 노트를 가지고 다녔었고, 한 단어나 한 문장으로 구성된 아이디어를 항상 기록해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기록해 놓은 아이디어는 저녁에 방에 돌아와서 정제하면서 확장할 수 있었고,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블로그에 '토끼굴'이라는 이름으로 올라갔다.
그 때는 속이 좁았긴 했지만, 나의 내면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내면도 함께 생각하고 동시에 모든 현상을 성경에 비추어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속이 좁은 부분만이 강화되어 나밖에 모르고 모든 현상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룰로만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재능과 감각은 없는데
속은 꽁하고 책은 좀 읽은 애들이
제일 불쌍한 것 같다.
-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아홉수
20대의 아홉수라고 하는 29살이 되었다. 무지개의 색이 사실은 일곱 가지로 딱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내가 살아온 인생도 딱 29단계로 나누어지지 않을테지만, 29라는 숫자는 참으로 위태로워 보인다.9라는 숫자가 가지는 불완전성 때문일 것이고, 그래서 아마도 아홉수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이다.
사용하는 음원 서비스의 검색창에 '서른'이라는 단어를 쳐 본 적이 있었다. (고)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너무 유명하다만, 박상민의 서른이면 이라는 노래는 이 검색으로 새롭게 알게 된 노래였다.
서른이면 나도 취직해서
장가를 갈거라고 생각했지
내 부모님과 내 집사람과
오손도손 살아갈거라고
돌아보면 다시 같은 자리
시간은 너무 빨리 흘러갔어
내 집살라고 모아둔 통장엔
몇 푼안된 돈만 있는
- 박상민, [서른이면]
이 노랫말의 화자처럼, 나는 서른이 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부모님과 남동생과 함께,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간다. 그렇다고 취직을 한 것도 아닌 나는, '학생'이라는 찬란한 타이틀을 가지고, 가까스로 내 먹을 것 정도만 벌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으며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이런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냄비 속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개구리처럼, 어느 정도 서서히 실패해가는 인생같기도 하다.
어제는 술을 꽤 많이 먹은 탓에, 새벽에 갑자기 토하고 싶어졌다. 토하면, 그나마 남아 있는 하루가 편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토하고 싶었는데, 화장실이 아버지가 자는 곳, 어머지가 자는 곳 모두와 가까이에 있어, 제대로 토할 수가 없었다. 숨죽이고 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고 있으니, 내가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 또 실감났다.
1월에 태어난 덕분에 내 동기들은 어느덧 서른이 되었지만, 그들도 딱히 설움을 아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1. 나는 전교 1등을 하면, 휴대폰을 사준다는 deal을 고 1때 아버지와 한 적이 있다. 전학을 와서 좋은 학군 아이들에게 영혼까지 털리고 있던 나는, 무슨 조화였는지 다행히 전교 1등을 하였다. 요즘 애들은 초등학생들도 가지고 노는 게 스마트폰이다만, 당시 내가 deal의 결과로 받을 수 있었던 건 그 당시에도 존재하던 '버스폰' 흑백 애니콜 플립형이었다. 즉 한 마디로 무료폰이었다. 내가 전교 1등까지 해서 그 폰을 쓰고 있을 때, 친구들은 색상도 찬란한 컬러폰인 스카이 등등을 사용하고 있었다.
2. 수능이 끝나자, 선생님들의 관심들이 쏟아졌다. 평소에 나에게 잘해주던 학생주임 선생님은, 부족한 내 내신을 고려했을 때 안전빵으로 붙을 수 있는 서울 내의 C의대를 추천해주었다.
생판 처음보는 어떤 익명의 선생님은, 대학교 가면 과외 같은 거 하지 말고, 학업에만 열중하라는 팔자 좋은 이야기를 하였다. 게다가 거기에 추가로, 내 뒷통수를 후리면서, 별 사이비같은 한의대같은 곳에 가지 말고, 공대에 가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고 하였다.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아저씨였다.
3. 담임 선생님이랑도 면담을 했었다. 나군의 S대를 쓰는 것은 서로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는데, 어느 과를 쓸 것인지가 정해지지 않았다. 의대 커트라인은 신의 영역이었고, 수의과대 이런 곳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렇게 되다 보니, 교수님께서 즉석에서 전기컴퓨터공학부를 쓰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다. "선생님 아들이 의대와 공대 중에 하나를 고민한다면, 어디로 보내시겠어요?"라는 질문에, 그 선생님은 의대를 선택했다. 즉석으로 정해진 그 과에서 나는 현재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
4. 다군은 선택지가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A대 의대에 지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때 아버지가 만류하였다. 고모, 즉 아버지의 동생 중에 한명이 A대 병원에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A대 대신, H대 공대에 지원을 할 수밖에 없었고, 합격하였다. H대 공대는 너무 하향지원이라서, 학교 차원에서 4년간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는 가군의 C의대와, 나군의 S공대를 버리고, 장학금을 주는, H대 공대에 가라고 넌지시 말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