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해당되는 글 5건

  1. 기독교에 대한 나의 입장 3 2012.02.08
  2. 복음의 가치 2008.09.24
  3. 복음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 2008.09.07
  4. 나는 구원받았는가? 2008.08.12

기독교에 대한 나의 입장

from 복음 2012. 2. 8. 02:06



 이 글은 완벽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제대로 글이 아니라 단지 생각의 플로우에 따라 내 입장을 정리해 본 글이다. 기독교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해 보았다. 반론당하고 싶어 쓰는 글이니 만큼 반론은 언제든지 환영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오롯히 남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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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의 뜻과 나라였다. 가치 판단이 개입되어야 하는 일들이 있을 때마다(컴퓨터공학적 용어로 pareto optimal인 여러 해가 있을 때마다) 일단은 내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미래를 조금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을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의 지혜에 의지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학부 2학년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나님의 음성을 ‘육성’으로 들려 달라고 정말 장기간 간절하게 기도해 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자 기도했던 일로 가장 기억이 나는 것은 나에게 들어왔던 몇 번의 과외 제의였다. 대개 과외 제의는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서 들어왔기에 나는 '기도해 보고 결정하겠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뜻 내지는 Sign을 구하는 기간을 가지곤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끝끝내 나에게 육성도 들려주시지 않으셨다. 꽤 좌절도 했지만 이에 대한 다른, 선배 기독교인들의 준비된 변호가 나를 달래주었다. 그들의 변호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교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이 없이 믿는 것이 더욱 복되고 아름답다”. 지금에 와서는 솔직히 그게 무슨 개소리냐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지만. 하나님은 딱히 우리의 삶에 간섭하려고 하시는 것같지 않다는 것이 그 때에 내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에 간섭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도대체 나에게 있어 하나님과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아니 그 이전에 하나님은 정말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아니, 그 전에 정말로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의 질문은 내가 신앙이 밑바닥을 칠 때마다 다달았던 반환점이었다. 

 이번에 검찰에서 한명숙 전 총리를 수사하면서, 검찰은 한 전총리에게 ‘돈을 받지 않았음을 증명’하라고 하였다.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일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라고. 증명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나와 기독교인들은 꽤 오랫동안 사용하여 왔다. 김어준 총수의 말을 빌려서 쓰고 싶다. “없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 시바.”. 존재는 증명할 수 있어도 부존재는 증명할 수 없다. 기본적인 논리인데, 기독교에서는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던 모든 시도들은 논파 가능하다. 가까이는 리차드 도킨스의 책만 봐도 도킨스의 말이 훨씬 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하나님 본인의 출석이다. 하나님이 망자도 아니고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인 이상, 출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실제로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는 좋은 디펜스가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는 죽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바울의 좋은 예가 있으니까. 근데 하나님께서는 서태지도 아니고 이른바 '신비주의' 전략으로 응수하시고 계시다. 하나님의 종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개먹칠을 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자비로 참고 출석을 거부하시고 계시다.
 
 예전에 안 믿는 친구들을 전도하고자 할 때에는 이른바 시계와 비행기의 비유를 사용하였다. 즉 시계나 비행기의 재료가 땅 위에 흝어져 있다고 하였을 때, 수억년, 수조년, 영원의 시간이 지난다고 하여 시계와 비행기가 될 수 없다. 즉 ‘인격’과 ‘지성’을 갖춘 무엇인가가 개입을 하여 조립을 해야만 시계와 비행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는 시계와 비행기, 궁극적으로 지성을 갖춘 인간 이전에 있었던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다. ‘저절로’ 세계와 인간이 나타났을리가 없다는 논리이다. 충분히 훌륭한 논리였고, 지금도 얼핏 생각하면 완벽해 보이는 논리이다.
 
 하지만 그 확률이 아무리 낮다고 하더라도, 그만큼의 ‘평행 우주’가 존재한다면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로또에 당첨될 확률이 낮아도 당첨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진화론도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그렇게 허무맹랑한 이론이 아니라, 과학과 실험에 근거한 이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하나님이라는 ‘가설’이 없어도 이 우주를 설명할 방법도 충분히 존재했었던 것이다. 진화론이 틀렸다고 믿는 것은 '교회'밖에 없다. 과학자들이 굳이 '틀린 가설'을 주장하고, 그렇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서만 ‘참’이 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할 순 없다. 즉 전제가 틀렸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남에게 자신의 주장과 도덕을 강요하는 것은 또다른 의미에서의 폭력이다. 전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이러 이러한 견해들이 존재하고, 본인은 그 중 하나인,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가 있음을 믿으며, 그것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독교에 대해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걸까? 현재 내 입장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 하나님은 존재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였다는 것, 그리고 무덤에서 일어나셨다는 것도 믿는다.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믿는다' 뭐 이딴 논리를 여기서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하셨던 그 이유, 즉 ‘죄’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하신 것일까? 예를 들어 아이폰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용자의 책임이 아니라 애플의 책임이다. 애플은 사용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없다.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런 존재로 창조하셨다면,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다. 생각보다 아이폰의 비유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실제로 애플은 아이폰 사용자들, 구입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예로 아이폰 4의 데스 그립 사건이 있다. 이 때 소비자들의 반응은 “잡스 느님의 말이 맞다. 우리가 아이폰을 잘못된 방법으로 쥐었기 때문에 통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었어” 따위가 아니라, “어째서 이딴 식으로 설계한거냐?”가 옳다. 아이폰4의 데스 그립은 명백한 애플의 강박적인 잡스의 디자인 욕심에 따른 공학적인 실수였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인간을 이런 연약한 존재로 창조했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단지 애프터서비스, 내지는 보안패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본인의 실수에 대한 본인의 수정인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감격하고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주 예수 이름을 제외하고는 구원을 받을 다른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도 베드로는 분명히 말하였다. 즉 예수 이름을 믿지 않는다면,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이는 댓가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칭송을 받지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으로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넌센스다. 즉 요지는 어떤 불분명한 사실, 증거가 ‘부족’한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것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각 사람의 ‘신앙’이나 ‘품성’에 좌우한다기 보다는, 각 사람의 지성에 그어져 있는 어떤 threshold에 기초한다. 즉 이에 따라 같은 증거가 있어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여서 신앙인이 되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고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꼐서는 이 지성의 threshold로 심판하실 수 없다. 이 지성의 threshold도 하나님께서 각자마다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악랄하게 예를 들자면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왔다고 생각해 보자. 

"연우네 어머니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연우가 사고를 당했어요. 지금 어디 병원인데 빨리 수술을 해야해서 돈이 필요합니다. "

 이 전화는 진실일 수도 있고 보이스피싱일 수도 있다. 진실이라고 믿어 돈을 부친다고 해서 멍청한 것도 아니고, 거짓이라고 믿어 끝까지 확인해 보려고 한다고 해서 독한 것도 아니다.  전화를 건 사람이, 혹은 전도자가 "제 말 못 믿겠어요?"라고 억울해 할 때, 그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고,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고, 근거들이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님이 존재해야만 하는 '당위'로 믿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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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가치

from 복음 2008. 9. 24. 05:39
복음의 가치

 한 가난한 농부가 있었다. 주인조차도 버린 그 황무한 땅에서 그는 식솔들을 먹일 거리를 찾기 위해서 땅을 파고 있었다. 그런 땅에서 흙과 돌 이외의 것이 나올리가 없었고, 농부는 그저 그 땅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집에서 기다릴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쉴 수 없었다. 마지막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일을 해야만 했다. 땅을 파고, 주저앉고... 이런 일을 부질없이 반복하던 중. 그리고 감추인 보화를 우연히 발견했다.


 농부는 집에 달려갔다.  그는 집 안에 모든 귀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값이 될만한 것들을 끌어모았다. 당장 먹을 마지막 감자 하나까지도 그는 아끼지 않았다. 아내는 미쳤다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에게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말할 시간조차도 아까웠다.

 어서 이 것들을 다 팔아 그 땅을, 그 밭을 사야만 했다.
 그 밭에는 그의 모든 소유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엄청난 보물들이 감추어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기 전에 서둘러서 그 땅을 사야했다.
 감자 한 톨이라도 모자라서 그 땅을 못 사는 일이 없도록 모든 소유를 팔아야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밭에 감추인 보화가 같다고 하였다.

 너무나 쉽게 사용되는 말. 다 아는 것처럼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는 말. '복음'

 순회선교단 복음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지원서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교회와 선교단체에 있으면서 너무나 쉽게 사용했던 그 말을 나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복음'이란 말은 왠지 초신자나 불신자들을 위해서나 필요하다고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복음을 위하여 죽었고, 하나님은 이 복음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사용했다.

 혹시 복음을 안다고 여기고 있는 당신께 묻는다. 그 복음은 당신을 조금이라도 변화시켰는가? 나를 변화시킬 수 없는 복음은 결코 복음일 수가 없다.

 복음으로 조금도 변화되지 않은채 주님을 위해 눈물겹게 살아주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과 내가 살아지는 삶의 모습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도무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변화시킬 총체적 복음, 완전한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라 '복음'을 우리에게 남겼다면 그 복음은 당신이 아는 것처럼 그렇게 무력할 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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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

 예수님의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부자 청년 (마가복음 10장 17 - 31절) - 그는 예수님 앞에까지 나와서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물었지만, 사실 그는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재물을 더 사랑했다. 예수님의 한 마디 말에 완전히 무너져버려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 니고데모 (요한복음 3장) - 그는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서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고 바리새인으로 방대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 니고데모였지만 예수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예수님과의 긴 대화 이후 그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죽은 다음에 다시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

3) 삭개오 (누가복음 19장 1~10절) - 이스라엘 사회의 공공의 적, 세리장이었던 삭개오. 키가 너무 작고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그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분주해보이시던 예수님의 눈이 그를 향했다. 눈이 마주쳤고 예수님의 두 마디 말에 삭개오의 마음은 완전히 녹아버렸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4) 사마리아 여인(요한복음 4장) -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은 참으로 특이한 기사이다. 성경의 무려 1장이 이 만남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세상이 다 욕하는 그녀에게도 메시아를 향한 믿음이 있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네가 말하는 내가 바로 그이다."
그녀는 곧 마을로 가서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다.

 같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이렇게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우리가 복음을 접했을 때에, 그리스도를 알았을 때의 반응은 어떠했었는가?

에베소서 1장 17절 이하의 기도가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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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원받았는가?

from 복음 2008. 8. 12. 21:46

나는 구원받았는가?

 이 글을 통하여서 상당히 격한 표현들이 많이 사용될 것이다. 사실 요즘의 교회와 목회자들은 격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일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나는 십일조의 축복. 믿는 자의 형통. 기도할 때 바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익숙해 졌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처세술’에 관한 설교. 시작할 때 말씀을 읽고 시작하고 교회에서 행해진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유명한 카네기 리더쉽 스쿨이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나 나올만한 이야기들이 설교 시간에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선포된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 믿음에 대해서는 앞으로 곧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이미 스스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완벽한 천국티켓을 소유하게 되었고, 더 이상 예수님은 필요없으며, 이제는 세상에 요구에 따라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조금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같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누가복음 17장 26~30절)

 한번 기억을 되살려보고자 한다. 노아 홍수 심판 때에 전 인류 중에서 몇 명이 구원받았는가? 의인인 노아 식구 여덟 명만 남고 나머지는 다 심판을 받아 죽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는 몇 명이 구원을 받았는가? 의로운 롯과 두 딸 외에는 모두 심판을 받아 죽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불 심판 때는 얼마나 구원받겠는가?
 인자의 때, 즉 예수님의 재림은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의 본격적 심판 때는 소수의 의인 외에는 거의 전부가 죽을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분명히 천국으로 이르는 길을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길이라고 한다.(누가복음 7장 13절)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지금의 전세계의 기독교 인구들이 모두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또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 누구나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천국에 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편 16~20절)

 다시 한번 경고한다. 이 글 전체를 통하여서 격한 표현들이 많이 사용될 것이다. 이 표현들이 험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상황이 훨씬 더 험악하고 위험하다.
 이제부터는 긴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계속하여 요구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또다시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이 자리로 불리워졌다. 언제까지 우리에게 이 기회가 주어질지는 모르는 일이다. 우리에게 이 기쁜 소식, 복음을 주신 분은 목숨을 걸고, 아니 목숨을 내던지면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다. 그런데 받는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받고 있는가? 목숨을 걸고 받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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