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에 해당되는 글 5건
- 기독교에 대한 나의 입장 3 2012.02.08
- 복음의 가치 2008.09.24
- 복음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 2008.09.07
- 나는 구원받았는가? 2008.08.12
---
한 가난한 농부가 있었다. 주인조차도 버린 그 황무한 땅에서 그는 식솔들을 먹일 거리를 찾기 위해서 땅을 파고 있었다. 그런 땅에서 흙과 돌 이외의 것이 나올리가 없었고, 농부는 그저 그 땅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집에서 기다릴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쉴 수 없었다. 마지막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일을 해야만 했다. 땅을 파고, 주저앉고... 이런 일을 부질없이 반복하던 중. 그리고 감추인 보화를 우연히 발견했다.
농부는 집에 달려갔다. 그는 집 안에 모든 귀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값이 될만한 것들을 끌어모았다. 당장 먹을 마지막 감자 하나까지도 그는 아끼지 않았다. 아내는 미쳤다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에게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말할 시간조차도 아까웠다.
어서 이 것들을 다 팔아 그 땅을, 그 밭을 사야만 했다.
그 밭에는 그의 모든 소유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엄청난 보물들이 감추어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기 전에 서둘러서 그 땅을 사야했다.
감자 한 톨이라도 모자라서 그 땅을 못 사는 일이 없도록 모든 소유를 팔아야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밭에 감추인 보화가 같다고 하였다.
너무나 쉽게 사용되는 말. 다 아는 것처럼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는 말. '복음'
순회선교단 복음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지원서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교회와 선교단체에 있으면서 너무나 쉽게 사용했던 그 말을 나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복음'이란 말은 왠지 초신자나 불신자들을 위해서나 필요하다고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복음을 위하여 죽었고, 하나님은 이 복음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사용했다.
혹시 복음을 안다고 여기고 있는 당신께 묻는다. 그 복음은 당신을 조금이라도 변화시켰는가? 나를 변화시킬 수 없는 복음은 결코 복음일 수가 없다.
복음으로 조금도 변화되지 않은채 주님을 위해 눈물겹게 살아주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과 내가 살아지는 삶의 모습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도무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변화시킬 총체적 복음, 완전한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라 '복음'을 우리에게 남겼다면 그 복음은 당신이 아는 것처럼 그렇게 무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예수님의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부자 청년 (마가복음 10장 17 - 31절) - 그는 예수님 앞에까지 나와서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물었지만, 사실 그는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재물을 더 사랑했다. 예수님의 한 마디 말에 완전히 무너져버려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 니고데모 (요한복음 3장) - 그는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서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고 바리새인으로 방대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 니고데모였지만 예수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예수님과의 긴 대화 이후 그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죽은 다음에 다시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
3) 삭개오 (누가복음 19장 1~10절) - 이스라엘 사회의 공공의 적, 세리장이었던 삭개오. 키가 너무 작고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그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분주해보이시던 예수님의 눈이 그를 향했다. 눈이 마주쳤고 예수님의 두 마디 말에 삭개오의 마음은 완전히 녹아버렸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4) 사마리아 여인(요한복음 4장) -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은 참으로 특이한 기사이다. 성경의 무려 1장이 이 만남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세상이 다 욕하는 그녀에게도 메시아를 향한 믿음이 있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네가 말하는 내가 바로 그이다."
그녀는 곧 마을로 가서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다.
같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이렇게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우리가 복음을 접했을 때에, 그리스도를 알았을 때의 반응은 어떠했었는가?
에베소서 1장 17절 이하의 기도가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나는 구원받았는가?
이 글을 통하여서 상당히 격한 표현들이 많이 사용될 것이다. 사실 요즘의 교회와 목회자들은 격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일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나는 십일조의 축복. 믿는 자의 형통. 기도할 때 바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익숙해 졌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처세술’에 관한 설교. 시작할 때 말씀을 읽고 시작하고 교회에서 행해진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유명한 카네기 리더쉽 스쿨이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나 나올만한 이야기들이 설교 시간에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선포된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 믿음에 대해서는 앞으로 곧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이미 스스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완벽한 천국티켓을 소유하게 되었고, 더 이상 예수님은 필요없으며, 이제는 세상에 요구에 따라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조금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같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누가복음 17장 26~30절)
한번 기억을 되살려보고자 한다. 노아 홍수 심판 때에 전 인류 중에서 몇 명이 구원받았는가? 의인인 노아 식구 여덟 명만 남고 나머지는 다 심판을 받아 죽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는 몇 명이 구원을 받았는가? 의로운 롯과 두 딸 외에는 모두 심판을 받아 죽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불 심판 때는 얼마나 구원받겠는가?
인자의 때, 즉 예수님의 재림은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의 본격적 심판 때는 소수의 의인 외에는 거의 전부가 죽을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분명히 천국으로 이르는 길을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길이라고 한다.(누가복음 7장 13절)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지금의 전세계의 기독교 인구들이 모두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또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 누구나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천국에 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편 16~20절)
다시 한번 경고한다. 이 글 전체를 통하여서 격한 표현들이 많이 사용될 것이다. 이 표현들이 험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상황이 훨씬 더 험악하고 위험하다.
이제부터는 긴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계속하여 요구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또다시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이 자리로 불리워졌다. 언제까지 우리에게 이 기회가 주어질지는 모르는 일이다. 우리에게 이 기쁜 소식, 복음을 주신 분은 목숨을 걸고, 아니 목숨을 내던지면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다. 그런데 받는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받고 있는가? 목숨을 걸고 받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