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에서 돈은 ‘무한한 교환가치’로 설명되고, 이와 동시에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권능’으로 묘사된다. 좋은 단어다. ‘권능’이라니.  


광야에서 금송아지, 즉 맘몬을 숭배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나는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로 본인들 앞에서 권능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변덕쟁이였고, 그들이 원하는 때에 권능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스라엘인들은 400년을 기다렸다. 오늘날 정치인들처럼,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공약을 주셨지만, 언제 그 공약이 실현될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주지 않으셨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과 신음은 갈수록 쌓아져만 갔다. 오랜 노예 생활에 익숙해진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도 의지도 그다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집트 민족의 장자들을 말살하는 권능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뜬금없는 것이었고, 너무나 잔인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집트 민족의 모든 장자들이 악한 주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권능을 행하고도, 힘있는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땅에서 나가야만 했다. 즉 객이 되어야 했다는 뜻이다. 이집트 땅의 주인은 이집트인들이였고, 그곳의 토착 우상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은 원하는 때에 힘을 발휘하게 해주는 권능 그 자체였다. 물론 쓸 수록 권능이 사라져 없어진다는 한계는 있었지만. 이스라엘 민족들도 돈의 힘은 알았을 것이다. 돈이 있으면 군대를 조직할 수 있고, 식량을 살 수도 있다. 위력 행사를 하지 않고도 가나안 땅을 통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대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보기에, ‘돈’은 정말로 신비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별 가치 없어 보이고, 스스로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이 녀석은 자연법칙 내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 땅 위에 구현된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 생사가 불분명해지자 그들은 돈에 의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돈 이상의 권능을 가지신 여호와께서는 분노로 그들을 치신다. 


하지만 거룩하신 여호와께서는 직접 그들을 치시지도 않으셨다. 거룩한 분께서는 거룩한 손인 레위인들을 쓰셔서 3000명을 도륙하셨다. 공지영 작가가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순간 중에 하나로 학창시절에 있었던 ‘상호체벌’ 사건을 들었었다. 즉 학생들끼리 서로 때리게 하는 것이다. 물론 학생들끼리는 쭈뼛쭈뼛할 수밖에 없다. 그 때 선생이 개입해서 한명의 턱을 돌려 놓으면, 나머지 학생들도 그 공포에 질려서 상대의 뺨이 빨개질 때까지 서로를 때리게 된다. 체벌이 끝나고 남게 되는 것은, 선생에 대한 공포나, 앞으로 잘해야지하는 새로운 다짐이 아니라, 친구를 향한 묘한 감정들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체벌 방식을 선진적으로 그 때에 도입하셨다. 즉 동족이 동족을 죽이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부서진 돌판의 여섯번째 줄에는 무의미하게 ‘살인하지 말지니라’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

주께서 자기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누가 감히 뵈올 수 있으랴 나라에게나 사람에게나 일반이시니 이는 사특한 자로 권세를 잡아 백성을 함해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욥기 34:29중~30)

지난 주 중고등부 설교 말씀은 욥기의 저 본문이었다. 마치 백분 토론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네가티브에 지쳐갈 때쯤 엘리후라는 뉴페이스가 등장하여 위의 발언을 한다. 저 발언의 정확한 의도를 내가 제대로 파악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저 발언을 들으면서 조금은 다르게 해석을 하였던 것같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 하나님께서 자기 육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시지 않는 것은 그를 빙자하여 백성들을 현혹할 것을 경계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면서,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제일 무서웠던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어의 활용이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순종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잘 모르겠는데, 하니님의 뜻을 잘 아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는 말씀을 안 하시고,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었을까. 다른 사람을 통해 100번 말하는 것보다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면 직빵일텐데. 아~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 정도로 믿음이 깊지 않아서 그랬던 거였을까.

기도를 해봤더니, 너는 죄를 짓고 있는 것같구나.

하나님께서는 친절하시게도 타인의 기도에 들어와서 나의 죄를 고자질하시는 분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뜻은 빙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만 주장했으면 좋겠다. 


제발 남을 정죄하기 위해, 남을 Manipulate하기 위해 성경과 하나님 말씀의 외연을 넓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

기독교 논박 - 선악과에 대한 겨타니 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성서에 대해 아주 깊이 있는 생각을 하셨군요. 물론 하느님과 아담의 관계는 부지관계 였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예에서 드신 것과 같은 아무 것도 모르는 '젖먹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완전무결한 창조물이었으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선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만족할만큼 먹어도 좋다. 그러나 선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의 열매는 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창2:16,17) 즉,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제외한 모든 나무의 열매를 원하는만큼 먹을 수 있었고 선악과를 먹을지 말지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선악과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지요. 선악과는 말씀하신 '독이 든 과일'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독이 든 과일은 그저 해로울 뿐이지만 선악과는 일종의 상징이거든요.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기준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다'는 기준. 선악과에 손대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드셨고 인간의 통치권이 그분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일종의 의례였습니다. 그래서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느냐 안 따먹느냐가 큰 문제가 되는 건 인간인 아담이 여호와 하느님(하느님의 이름입니다)의 통치권에 순종하느냐 마느냐하는 큰 문제가 달린 것이지요. 그렇게 따지면 여호와께서는 아예 처음부터 아담이 선악과에 손을 댈 마음이 안 들게끔 만드셨을 수도 있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그분은 아담을 선택권을 지닌 자율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논점이 있다.

  • 아담은 완전무결한 창조물이었으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은 것에 대해 하나님의 탓을 할 수 없다.
  • 선악과는 일종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통치권에 순종하느냐 마느냐하는 큰 문제가 달려 있는 과일이었다. 즉 선악과를 아담이 먹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통치를 거부하는 반역 행위였다.

겨타니 님의 말씀대로 아담이 완전무결한 창조물이었다고 가정하자. 그 완전무결한 창조물인 아담은 선악과를 먹는 것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말의 절대성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사단이 자기를 꾀기 위해 하와에게 접근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것만 봐서는 아담이 완전무결한 창조물이었던 것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이렇게 제대로 동작하지 못하는 인간을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다.

그분은 아버지로써 자녀의 선택권을 존중하신 것이었고, 독이 든 과일을 둘 수 밖에 없었던 것만큼 어리석은 하느님이었던 것이 아닌 인간은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분별하기 위한 상징물로써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나무'를 두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졌고, 따라서 하느님을 따라야한다 이것이 인간이 알아야할 태초의 계명이었던 것입니다. 왕이 백성들에게 자신이 정당한 그들이 군주임을 선포한 것과 같은 의미이지요. 반면 선악을 분별하는 열매를 따먹는 다는 건 선악을 판별할 존재는 하느님이 아닌 우리에게 있다는 반역의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친구의 교회에서 여중생이 혀에 피어싱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피어싱 자체가 좋다 나쁘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만, 내가 여중생의 아버지였다면, 어려서부터 몸에, 그것도 가장 민감한 부분 중의 한 곳인 혀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말렸을 것같다. 물론 피어싱을 한 후가 아닌, 피어싱을 하기 전에 말이다. 내 딸이 몰래 피어싱을 한다면 내가 말릴 수 없겠지만, 그건 내가 유한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아버지이기 때문이고, 내가 전지전능하다고 가정했을 때 미처 말릴 수 없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야 아담이 어디 있냐고 찾으셨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을 때, 죄의 유혹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최근에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패륜적인 성범죄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범죄자들의 잘못도 있지만, 경찰의 잘못도 어느 정도 지적되고 있다. 특히 경찰이 그 성범죄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면 어떨까? 최초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실시간으로 그 현장을 시청하시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리고 아담과 그 후손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아담은 완벽한 존재였습니다. 그에겐 단점이나 부족한 점이라고는 없었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었지요. 하지만 선악을 분별하는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아담은 하느님의 통치에 따를 뜻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나타냈습니다. 여호와의 인도에 따를 생각이 없다면 당연히 그분이 주시는 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법. 아담은 반역, 즉 죄의 대가로 완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따라서 반역 후의 아담의 자손은 아담이 지은 죄로 불완전하며 태생이 나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늙어 주을 수 밖에 없지요. 태초에 아담에 비해 그의 후손들은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가르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아담처럼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겐 수 백개의 율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성서에서 전쟁을 지휘하신 부분들을 보면 그들이 단순히 유대인이 아니거나 율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진멸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성서에는 외국인이더라도 그 믿음이 올바르고 여호와께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는 여리고의 창녀였던 라합과 그의 가족, 보아스의 아내 룻-룻은 유대인이 아니었는데도 예수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외국인 거주자를 결코 차별해선 안 된다는 법률도 율법에 나와있지요. 하느님께서 진멸하신 나라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그들이 아주 타락했고 죄질이 나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 하룻밤만에 18만 5천명을 죽게 한 아시리아는 민족이 상당히 전투적이었으며 노예들의 가죽을 벗겨 걸어놓는 등 아주 잔인했습니다. 또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약 40여년이나 걸렸던 것은 그들이 이교의 신을 받들어 간음을 하고 우상숭배를 하는 등(그들은 하느님과 계약한 그분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여호와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는 아주 커다란 죄였습니다) 끔찍한 죄를 많이 저질렀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주변 다른 국가의 신들을 섬기며 자식들을 불길 위를 지나가게 하는 등 그들의 종교 의식은 잔인하고, 패륜적이며, 성적으로 문란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선 그들을 정죄할 권리를 당연하게 갖고 계셨던 겁니다.

이렇게 민족 전체를 싸잡아서 전투적이고, 잔인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자식들을 불길에 태우고, 패륜적이고, 성적으로 문란하기 그지 없다고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심지어 아시리아인 개개인이 빠짐없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아와 노인들의 목숨까지 말살하는 것이 그들이 지은 죄에 대응하는 적합한 형벌이었을까? 쉽게 말해 연좌제이다. 


조승희 사건이 새삼 떠오른다. 조승희는 한국인이었고,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32명을 살해했다. 가나안 민족을 말살시킨 이 논리대로라면, 미국은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조'씨들을 말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아직도 인권이 불완전한 현대에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이 사건에 대하여 한국과 한국인들을 비난한 미국인들도 거의 없다고 알고 있다. 이는 조승희의 죄이지, 조씨 문중의, 그리고 한국인의, 나아가 인류의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인제 그거야. 여섯 명이 죽었어. 내 난장이에 보면 폭력은 경찰의 곤봉이나 군대의 총만이 폭력이 아니라고 그랬어. 우리 시대의 어느 아이 하나가 배가 고파서 밤에 울면, 그 아이의 울음소리 그치게 하지 않고 그걸 놔두는 것도 폭력이라고 그랬다고. 어제 어마어마한 폭력이 가해졌는데도 우리가 그냥, 그냥 지나간다면 우리가 죄를 짓는 거야. 거기에 가서 철거민을 우리가 두드려 패고 화염 휩싸인 데서, 그 뜨거움 속에서 죽게 했다는 게 아니야. 우린 그런 죄는 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 죄를 미리 막지 못한 죄는 우리가 지었지. 그래서 동시대인으로서 우리는 다 같은 죄인이야. 나도 똑같은 죄인이야.  - "이 선을 넘으면 위험하다 : 조세희 작가한테서 듣다" by 박수정 (르포작가)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인간의 죄성이다. 인간의 죄성은 너무나 강하고, 인간의 힘으로는 스스로 그것을 구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인간들로 하여 ‘창조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끔 한다. 인간의 죄성이 동의되지 않으면, 마치 부활이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는 무의미해지고,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된다. 


그동안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다양한 죄목들을 활용해 왔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효도하지 않거나 친구를 미워하는 것, 그리고 2차 성징이 지난 남성들에게는 음란한 마음을 품고 자위행위를 하는 것 등이었다. 대학생과 어른들에게는 음주나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것을 대표적인 죄악으로 소개하며 교인들을 정죄하였다.


하지만 고작 이런 죄들 때문에 예수님이 그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다고 생각하면 사실 좀 어이가 없다. 이는 배트맨 시리즈의 역사에서 검열 때문에 조커가 고작 시험을 잘 본 학생들의 시험지나 훔치던 시절을 연상시킨다.


힌트는 성경에서 다시 찾을 수 있는 듯하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우리의 가장 큰 죄악은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다 뿐이지, 우리 주위에 고통을 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산업재해로 백혈병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 한 학기 수업을 듣기 위해 한 학기를 통째로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 알콜중독 아버지에게 시도때도 없이 맞는 자녀들과 어머니.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들은 계속해서 울고 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관심을 주지 않고, 방조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어디에 있을까.


진짜 울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지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 이 지랄을 하면서, 자기 마음 속만 들여다보기에 바쁘다. 우리들은 애써 지척에 보이는 그들로부터 눈을 돌리고, 아름다운 것, 좋은 것, 재미있는 것만 보고자 하면서 살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