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적벽대전1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감상을 말할 때 재미있었다는 말처럼 무책임하고 무의미한 말도 없지만 말이다.
연의에서 제갈량에게 눌려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던 주유의 재평가도 신선했고,
특히 조조군과 지상군끼리의 싸움을 통해
통해 삼국지연의를 읽으면서 사실 감이 잘 잡히지 않았던
진법에 관한 부분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사실 조운과 주유의 캐스팅은 별로였지만,
(영화 속에서 조운은 너무 동네형처럼 생겼고,
주유는 삼국지에서 몇 안되는 '미'의 별명이 붙은 사람과는 거리가 먼 강인한 인상이었다.)
관우와 제갈량의 그것이 너무 좋았기에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사실은 삼국지연의에서 엄청난 지면을 할애하여 묘사한 적벽대전을 그린 [적벽대전1]과
조운의 일대기를 가상으로 극화해서 그렸던 영화인 [삼국지 : 용의 부활]을 비교하는 포스팅을 쓰려고 하기도 했었다. 물론 게으름에 져서 하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적벽대전2는 여러가지 면에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심하게 기대하고 있던 나로서는 이가 갈릴 정도의 일이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나올 수도 있으니
영화를 볼 생각이라면 더이상 읽지 않아도 좋다.
사실 삼국지연의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전쟁의 결말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비주얼로 승부를 봐야만 했다.
트로이나 300을 능가한다고 광고했던 비주얼은 만족스러웠으나,
안 그래도 이미 판타지 소설인 삼국지연의 자체를 심하게 왜곡해서
아예 말도 안되는 만화가 되어져버렸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1. 조조의 진영에서 남방의 기후와 선상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병사들이
병이 걸리게 되고, 조조는 그 병으로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동오로 보낸다.
그리고 그 시체에 접촉한 동오의 병사들도 병에 걸리게 된다.
말도 안 되는게 평생을 남방에서 살았던 남방의 병사들이
풍토병에 걸려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다니.
그러면서도 주유는 "저들이 저런 더러운 수를 써도 나는 정정당당하게 싸우겠다"
라고 하면서 계교를 써서 채모를 죽이고 제갈량을 이용해 화살10만개를 속여 빼앗는다.
대인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조조의 진영에 무려 손권의 여동생인 손상향(...)이 첩자로 잠입한다.
게다가 손상향은 조조 진영의 정보를 비둘기를 통해서 주유와 제갈량에게 전달하는데,
이는 마치 해리포터의 부엉이들을 보는 듯했다.
손상향은 마치 야자를 째는 고등학생처럼 담을 넘어서 조조의 진영으로부터 도망쳐서
무사히 귀환한다.
조조군의 진영의 지도를 가져왔는데, 무려 몸에 감아왔다.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옷을 벗고
소교보고 끝을 잡으라고 한 후 몸을 빙빙돌려서 지도를 펼치는데,
작가가 기네스 펠트로 팬인지 [셰익스피어 인 러브] 패러디를 하는 모양인데,
손상향의 얼굴이 안습이라 보면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차를 마시고 눈을 감고 심호흡을 몇번 한 후에야
다시 삭발을 하고 싶은 욕망에서 겨우 벗어났다.
OME(Oh my Eyes!!!)
3. 조조는 지가 어리석어서 주유에게 속아 수군사령관인 채모와 장윤을 죽여놓고
주유의 진영에서 밀서의 복사본도 아닌 원본을 구해서 온 장간을 죽인다.
물론 연의에서도 비슷하긴 하지만 조조는 장간을 벌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간을 죽이는 방법의 비열함인데,
파티를 열어놓고 장간의 술에 독을 타서 죽인다.
조조는 중국 대륙 최대권력자이고 장간은 그냥 찌질이 87급 공무원 쯤에 불과하다.
귀향을 보내거나 사람을 시켜 목을 베면 될 것을,
마치 노예가 왕을 암살하듯이
몰래 들킬까봐 숨어서 음식에 독을 탄다.
조조의 찌질함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라면 너무나 심했다.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부터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4. 동남풍이 불 때까지의 조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주유의 아내인 소교가 조조의 진영에 투항한다.
기껏 투항한 소교를 데리고 희대의 호색가라는 조조는
고작 소교와 차를 즐기다가 적벽을 공격할 타이밍을 놓친다.
5. 제갈량이 조조에게서 화살 10만개를 얻어오는 장면.
삼국지연의를 볼 때는 여기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었는데
실제 영화를 보니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상대편에서는 화살을 단 한 개도 쏘지 않는데,
조조군은 화살을 10만개나 쏟아부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뭐 사실 이 이상 어떻게 할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6. 아무리 그래도 손권군은 고작 3만이고, 조조군은 100만이다.
화공에 성공했다고 해도 한 지방의 군주인 손권이 최전방으로 나와서
칼부림을 하는 것이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손권이 죽으면 오나라는 끝인데 무슨 짓인가 싶었다.
7.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하후돈이 소교를 인질로 잡는다.
갑자기 삼국지 3대 대전 중 하나인 적벽대전이 (나머지는 관도전투와 이릉대전이다)
일개 인질극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동시에 오나라 장수들은 얼음땡.
처음부터 그럴 것이었으면 조조는 왜 소교를 인질로 활용해서 오나라를 압박하지 않았을까?
뱃머리에 매달고 진격했으면 되잖아! (너무 잔인한가?)
8. 결국 희대의 인질극은 실패하고, 조조 홀로 남는다.
그리고 한나라의 역적 조조 앞에서
(나는 그닥 조조를 역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영웅으로 생각하지만)
쿨가이 주유의 한 마디.
"가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무슨 동네 불량배 훈방조치 하는 경찰도 아니고...
대인배들은 그냥 다른걸까?
이 모든 말도 안되는 설정들로 인하여서
영화를 보면서 손가락이 손바닥을 찌를 정도로 손과 발이 오그라들었고,
이것을 본다고 3시까지 자지 못했던 게 서러워져서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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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 평 - 조조가 Fika(스웨덴 말로 티타임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하다가 전쟁을 그르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