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연합뉴스
"엄마" - 장영희 교수의 마지막 말.
"영희야 수고했다, 우리도 너를 위해 기도하마. 영희야 안녕” - 서강대 손병두 총장
“불이 꺼지지 않은 장 교수의 연구실을 항상 그냥 지날 수 없어 5분만 있겠다고 하다가도 1시간씩 남아 수다를 떨었다” - 신숙원 명예교수
“영희야 사랑한다, 고맙다. 못난 오라비를 용서해라” - 오빠 장병우 씨
장영희 교수님이 암 투병 중에 작고하셨다는 소리를 들었다.
소아마비 1등급 장애우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나에게는
스웨덴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던, 5번도 넘게 읽었던 [문학의 숲을 거닐다]의 저자.
시로 영어를 공부하겠다며 깝치고 있을 때 서점에서 반갑게 발견했던 [생일]과 [선물]의 저자.
많은 사람들의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주지 않는 슬픔일지도 모르지만
단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이 분이
말 한 마디, 메일 한 줄 섞어보지 못했던 이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왜 내가 키보드 위에서 손이 무너져 내리고
눈물까지 내면서 슬퍼하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그 글이 내 가슴에 벅차게 차올라 있었던 것이겠지.
그 삶이 진실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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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 같던 사람이 죽으면서 가장 가슴 아파한 것은
결국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회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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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낭만주의 수업 시간에 이유영 선생님은 칠판에 거대한 원을 그려놓고
[푸른 꽃]의 복잡다단한 상징체계를 설명하고 계셨다.
우리도 노트에 그림을 옮기느라 교실이 아주 조용했는데
누군가 뒤에서 길게 한숨짓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선생님은 갑자기 홱 돌아서시더니 소리치셨다.
"누구야! 지금 한숨 쉰 사람 누구냐고!!"
떠들어도 별로 야단을 치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반응은 너무나 의외였다.
"지금 몇 살이야, 예순? 일흔? 한숨 짓는 것은 포기하고 싶다는거야.
한숨짓는 것은 싸움에 지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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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라면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다.
늙고 병들고 불구자가 된 것이 내 허물은 아니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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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3학년이 되던 해 여름, 일찍 찾아온 장마 때문에 세 번 결석한 내게
교수님은 당신이 한 말씀을 잊으시고 내게 가차없이 F를 주셨다.
(장애우인 교수님은 비오는 날,
비포장도로를 지나 그 수업이 있는 곳까지 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러던 중 넘어져 진흙투성이가 된 교수님을 보고
비 오는 날은 오지 않아도 결석으로 치지 않겠다고 하셨다.)
나의 충격은 컸다. 교수님의 대한 원망, 억울함, 부당함,
그리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운명 때문에
F라는 굴욕적인 점수를 내 성적표에 담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정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다.
또 과목 낙제를 하면 다른 과목 성적이 좋아도 장학금 수혜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학칙 때문에
그 학기에 나는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당시 영문과 과장님이시던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갔고,
내 이야기를 들으시다가 신부님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셨다.
너무나 화가 나서 얼굴은 빨개지고 말까지 더듬으셨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수가. 그건 네 잘못이 아닌데..."
그리고 나는 그 때 분명히 보았다. 신부님의 눈에 고인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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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기절하면서도 시를 읽는 어리석음이 문득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웬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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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무슨 일인지 막무가내로 떼를 쓰면서 울고 있었다.
그때 마침 나를 발견한 그 여자는 갑자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저 봐, 에비 에비. 너 계속 울면 저 사람이 잡아간다"
하는 것이었다. 나를 흘끗 올려다본 아이는 참으로 신기하게도 순식간에 울음을 그쳤다.
--- 이상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발췌.
한번 암을 이기시는 모습을 보고
다시는 암에 지지 않으시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가족력은 어찌할 수 없나봐요.
메일 한 줄 보내서
책 잘 읽었어요라고 말해줄 수도 있었을텐데
수고하셨어요. 푹 쉬세요.
2008년 7월 27일 비행 중에 책 위에서 썼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