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글쓰기 모임을 위해서 쓴 글이다.
주제는 '여름' 이었고,
여름 -> 햇살 이런 연상과정을 거쳐서 썼다.
한국에 있다가 스웨덴으로 오게 되면서
비행기 안에서 수만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감의 압박 속에서 그 와중에 생각났던 것들을 글에 담았다.
박진영이 작사한 '대낮에 한 이별'이라는 곡
그리고
'초속 5cm'라는 영화를 보면서 많은 모티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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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행
1
오랜만에 창을 열었다.
이국의 하늘은 엄청나게 높고 맑았다. 곧 기분 좋은 바람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상쾌한 냄새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코끝이 찡해지고 문득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스스로도 내 몸의 반응에 놀라서 황급히 휴지를 찾았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그 이후로는 이렇게 눈물이 갑작스레 나곤 한다. 다시 차 한 모금.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휴지를 양 눈 사이에 꽉 끼우고 잠시 머리를 뒤로 젖히고 앉았다. 마치 코피가 난 것처럼. 이럴 때는 속절없이 눈물이 그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2
햇살이 아주 따뜻했다.
이미 마지막 말도 꺼내기 전에 둘 다 울고 있었다. 내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계속 눈물이 흘러내리는 주제에 우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억지로 가다듬으면서 물었다. 혹시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냐고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바보처럼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못했다. 질문을 한 나를 원망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던 것이었다. 우리 둘 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가슴이 너무나 먹먹했다. 주저앉고 싶었다.
햇살이 아주 따뜻했다.
3
어디를 가도 그녀와의 추억, 그녀의 흔적이 있었다.
그녀와 가보지 않았던 곳이 아무데도 없는 것 같았다. 누구와 같이 있어도, 무슨 일을 하더라도 마음이 그저 아팠다. 그녀가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어떤 생각도 하기 전에 이미 눈물부터 나오고 마음이 아파왔다. 도저히 어떤 일도 새로이 시작할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없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녀와 한 번도 같이 밟아보지 않았던 땅, 그녀와 한 번도 같이 바라보지 않았던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는 마치 주인을 잃은 마리오네트처럼 나는 아무렇게나 꾸겨져 버릴 것만 같았다. 떠날 준비를 했다.
4
떠나기 전날 술을 마셨다.
코와 목을 타들어가라 술을 마셨다. 아니 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독을 마시듯 술을 마셨다. 이 술을 먹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곧 나의 이성은 마비되었다. 내가 왜 그녀를 떠나야만 했는지. 그녀가 왜 나를 떠나야만 했는지. 우리가 왜 헤어져야 했는지를 잊게 만들었다.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폰에서 지운 지 오래지만 내 가슴에서는 절대로 지울 수 없는, 내 손이 기억하고 있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했다.
“야. 너 일 년간 아무 사람도 만나지 마.
나 돌아올 때까지 그 누구도 만나지 마.
나도 아무도 안 만날 테니까 일 년간은 제발 아무도 만나지 마.”
또다시 침묵.
“그러고 나서......”
그러고 나서 다시 만나자라는 말을 차마 이을 수가 없었다. 힘없이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전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더 들리지 않았다. 한번 내뱉은 말은 어찌할 수 없었다. 갑자기 수많은 이유들과 과거들이 내 머리를 채워왔다.
이 기억은 술을 깬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5
비행기를 탔다.
어제 밤에 취해서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내 전화기에는 어떠한 문자메시지도, 부재중 전화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 때 무슨 대답을 하려고 했었을까.
노트를 꺼내들었다. 쓱쓱 일기를 적어 내려갔다. 그런데 옆에서 가만히 나를 보던 할아버지가 내 노트를 갑자기 뺐어들었다. 나는 멍하니 그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이거 재밌겠는데.” / “네?”
B | |||
기다린다 |
배신한다 | ||
A |
기다린다 |
||
배신한다 |
할아버지가 그려준 표는 대략 이러했다. 나에게 노트를 툭 던지더니 푹 잠들어 버렸다.
나는 멍하니 노트를 내려다봤다. 빈 칸이 있었다. 마치 나보고 한번 채워보라는 듯이…….
같이 기다려서 그녀와 내가 다시 만난다면……. 그것을 정말로 기쁜 일일까? 아니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멈추지 않았던 눈물과 형편없이 문드러졌던 내 가슴……. 그 기억이 내 펜을 흔들리게 했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나는 표를 완성해나갔다.
B | |||
기다린다 |
배신한다 | ||
A |
기다린다 |
(5, 5) |
(1, 10) |
배신한다 |
(10, 1) |
(5, 5) |
짓궂은 일이었다. 이 표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 배신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 믿음, 기대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북북
이 할아버지가 내 노트를 찢어버렸다.
“이런 게 무슨 소용이야, 그 나이에”
6
수 만 가지 생각을 했다.
비행기가 연착되고, 또 갈아타고, 식사가 나오고, 불이 꺼지고, 다시 불이 켜지고, 다시 식사가 나오고…….
하지만 도저히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짐을 부지런히 챙겨서 낯선 공항을 빠져나왔다. 눈물이 흘렀다. 어리둥절해져서 황급히 다시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그 어떤 때보다 서럽게 눈물이 나왔다. 얼굴이 곧 눈물범벅이 되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움켜줘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힘겹게 문을 밀고 나가는 순간 알았다. 햇살이 너무나 따스했다. 해가 거의 뜨지 않는 나라라고 들었는데, 햇살이 너무나 따스했다. 그녀가 느껴졌다. 이별이 또다시 현실로 느껴졌다. 또다시 경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