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지난번에 인문학 글쓰기 숙제로 한 [햇살]은 '1회'짜리 소설이었다.
그래도 누군가가 내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마워져서,
[햇살]의 이전 이야기를 조금씩 써보기로 했다.
오늘의 이야기는 짧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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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 그 이전
강신행
1.
다행스럽게도 그 자리가 비어있었다. 언제나 우리가 앉았던 창가 쪽 자리. 그 자리가 채워져 있으면 그 자리가 보이는 근처 다른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들이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점원이 테이블이 치워주기도 전에 주섬주섬 커피랑 케잌을 옮겨 앉곤 했었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각설탕과 새 우유가 놓여 있는 그 자리에 앉아 내가 즐겨먹는 카페모카를 한잔 주문했다.
내가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항상 그가 먼저 와서 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곤 했다. 내가 일부러 늦장을 부리거나, 약속에 늦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일찍 오더라도 그는 이미 자리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페로 들어서면 항상 그의 우직한 등이 보였다. 그는 등이 넓은 사람이었다.
“언제 온거야?”
라고 물어도 그는 언제나
“3분 전에”
하며 방긋 웃을 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일찍 와도, 내가 아무리 늦게 와도 그는 항상 3분 전에 도착하는 사람이었다.
“쳇.”
2.
“모카 먹을꺼지?”
“응.”
“그럼 카페 모카 2잔이랑 초콜릿 케잌이랑 주세요”
오늘도 그는 열심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끊이지도 않고, 주제도없고, 그리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내 이야기들을 공감하며 들어주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저 “듣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들이 꽉 차 있어서 도무지 나의 이야기같은 것은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새부턴가 말을 줄이게 되었다.
하지만 항상 그를 만나면 왠지 내 이야기가 그에게 다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어쩌다가 길거리에서 소음으로 내 말을 조금이라도 놓치게 되면, 그는 항상 다시 말해달라면서 고개를 숙여 귀를 기울였다. 그는 내 말을 “들어주었다”. 내 존재를 받아주는 느낌이었다.
가끔은 너무 궁색해져서
“아, 오늘도 내가 말만 하는구나. 너도 말 좀 해~~”
사실은 그에게 말할 빈틈도 주지 않고 쉬지 않고 말한 주제에.
“응? 나 말 많이 했어.”
“에이... 내가 한 3시간동안 혼자 떠든 거 같은데... 입 안이 다 말랐다, 너 바쁜데 이렇게 내 이야기 오래 들어주고 있어도 괜찮아?”
“내가 들어 주는 게 아니야. 내가 받는 거지. 니가 말해 주는 거지”
“... 요즘 너 바쁘잖아?”
“있잖아... 난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항상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해. 이 사람이랑은 몇 분 짜리, 이 사람은 한 시간 짜리. 이렇게 스스로 한계를 정해놔.”
“...”
“그런데 난 단 한번도 너랑 함께 있는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
그 날 그는 그렇게 고백했고, 우리는 교제를 시작했다.
3.
“나 조금 늦을 것같아. 미안해.”
숨이 넘어갈듯한 목소리.
“서둘지 말고 와. 천천히”
“...”
“널 기다리는 거 참 좋다.”
“...”
평소에 기다리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는 나라서, 약속 시간이 지나면 1분도 기다리지 못하고 전화를 거는 나였지만, 오늘의 기다림은 달랐다. 문가를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마음이 떨려왔다. 언제 그가 올지, 그가 들어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그도 이 자리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벌써 커피 3잔째였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한 행복감이 번져왔다.
그동안 너무나 오래 보지 못했던 그가 온다. 저만치 허둥지둥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가 보인다. 늦었기 때문이었을까 당황한 표정이었다. 바람에 날려 머리도 완전 흐트러졌고, 코트 단추도 잘못 끼워 넣은 모습이었다. 미소가 나왔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와”
들리지도 않을 말이지만 과장해서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말해보았다.
그가 온다.
너무나 슬픈 눈을 한 그가 온다.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해주지 않더라도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야 겠다.
이미 행복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나는 행복할 것같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던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정말... 꿈에서도 아른거렸던 그를...
내가 여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나에게 온다.
그의 생명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4.
"나는 니가 나에게 시간을 써주는 게 너무 고마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무한한데, 시간만은 유한한거잖아.
그래서 가장 귀한 선물은 '시간'을 내게 주는거라고 생각해.
시간을 주는 것은 생명 자체를 주는 것과 같은 거거든
생명은 한번 주면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는 거라 더더욱 귀한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