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참 열심히 살았다
공 병우 (한글 기계화 연구인)
너는 내가 처음 만난 나의 비서
너는 세상에 처음 태어난 나의 비서
너는 햇살같이 빠르고 정확한 천재 비서
나는 네 도움으로 열흘 할 일, 하루에 해치우니,
10년 걸려 할 일 1년에 하게 되었네.
나는 너 없이는 하루도 잠시도 일하고 싶지 않고
할 수도 없게 되었네
지금은 진정 너 없이는
즐거운 나의 생활 할 수 없네.
(중략)
나는 여태껏 많은 비서들과 일해 보았지만
너와 같이, 일해 갈수록 깊은 정이 들기는 처음.
그래서 너는 진정 나의 첫사랑 애인과 같은 나의 비서
(후략)
이것은 내가 쓴 <너는 나의 비서>라는 시이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로 하여금 감격에 겨워 시를 쓰게 해준 나의 비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팔십이 넘은 늙은이가 웬 주책으로 비서 자랑을 늘어놓느냐고 말할 사람들을 위해 먼저 얼른 내 비서의 정체를 밝혀야겠다. 내 비서는 다름아닌 내가 개발한 “공병우 직결식 워드 프로세서”이다.
펜으로 글을 쓰는 것을 손수레나 달구지 타는 것에 견준다면 수동식 타자기는 자전거, 전동 타자기는 오토바이이고, 컴퓨터는 자동차였다. 그 자동차는 내 시간을 엄청나게 아껴 주었으니, 내가 어찌 내 비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글 기계화에 바친 정열
나는 평생 동안 어떻게 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까를 연구해온 사람이다. 그러자니 먼저 문자 생활에 드는 시간을 절약해야 했다.
그리하여 젊은 식자층에게 펜보다 컴퓨터가 훨씬 더 익숙한 물건이 된 오늘날로부터 무려 40여 년 전에 한글의 기계화라는 과제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다섯벌식이니 네벌식이니 두벌식이니 하는 자판 체계가, 한글 자모의 원리를 헤아리지 않고 만들어진 것이어서 힘도 들고 시간도 더 드는 비합리적인 자판 체계라는 결론에 이르러 한글의 원리대로 만든 세벌식을 쓰자고 주장하다가 반정부적인 인물로 여겨져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간첩과 같은 대접을 받기도 했고, 안과 의사이면서 생전 배워도 못 본 타자기니 컴퓨터니 하는 기계들을 가지고 연구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시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내 신념에 비추어보자면 그 어느것 하나도 내 궤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니, 나는 그야말로 내 정규 노선대로 살아온 셈이다.
내 정규 노선 기차인 매킨토시 컴퓨터에는 이런 말이 크게 쓰여 써 있다.
'시간은 곧 생명이다.'
내가 일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으면 컴퓨터 화면에는 저절로 커다란 괘종시계 그림과 함께 이 경구가 뜬다. 쉬는 동안에도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해놓았다.
그렇다. 시간은 곧 생명이다. 그래서 나는 내 시간을 아껴주는 모든 문명의 이기를 좋아한다. 크지 않은 내 방에는 컴퓨터, 팩시밀리, 모뎀 따위의 기계가 가득 차 있다. '공병우 박사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검약한 사람이라던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한 대에 몇백만 원이 넘는 기계들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기계값 비싼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보다.
컴퓨터는 사람들의 시간을 아껴준다. 옷치레, 겉치레에는 철저하게 돈을 아껴야 하지만, 컴퓨터로 문자 생활을 하고, 또 여러 다른 분야에 그 기계를 이용하여 시간을 아끼는 데는 돈 절약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내 방 안에 가득차 있는 기계들의 값을 치면 모두 천만 원이 넘을 것이다. 나는 이런 기계의 덕분으로 3년 전부터 서울의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한글 문화원 사무실로 출퇴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사무실 직원들과 전화, 팩스, 컴퓨터 통신으로 사무 자동화에 완벽을 기하면서,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을 절약하고 있다. 이런 비싼 기계를 쓰는 나는 언제나 블루진 바지와 다 낡은 셔츠를 입고 앉아 있다.
옷은 세 벌만 있으면 산다
가끔 '옷이 날개다'라는 말을 하며 내게 옷에 좀 신경을 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보다는 오히려, '살아가는 데에는 세 벌의 옷이 있으면 된다'는 독일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일할 때 입는 작업복, 극장이나 식당 같은 곳을 출입할 때 입는 나들이옷, 파티에 초대받아 갈 때 입는 예복, 이 세 벌만 있으면 아무 불편없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별 불편을 끼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나로 말하자면 식당에 가서 외식하는 기회도 드물고, 집안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으니 내가 늘 작업복을 입고 지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중국 정부 고위직 사람들은 이른바 인민복을 입고 있는데, 나는 우리나라 정부 고위직 사람들도 그런 모습을 본받아야 된다고 느낀다. 물론 그이들과 우리의 옷 문화가 다르니 그렇게 똑같은 옷을 입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 옷도 개발하기로 치자면 그만큼 간편한 옷을 만들어내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날마다 바꾸어 매야 하는 넥타이, 줄이 서게 다려 입어야 하는 양복 바지. 또 때묻으면 그때그때 빨아야 하는 하얀 와이셔츠까지, 그런 옷을 입는 사람이나 뒷바라지 해주는 사람이나 모두 피곤케 하는 옷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이 화려하고도 복잡한 의생활을 간소화하는 캠페인이라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날이 옷을 차려 입는 일에 많은 시간과 신경을 써야 하니 그 또한 낭비가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이렇게 시간, 시간 하는 내게도 돈을 아끼려고 시간을 낭비했던 시절이 있었다.
평양 의학 강습소 입학 시험 준비를 하던 때의 일이다. 시험 과목의 책을 사러 나는 신의주로 가야 했다. 멀쩡히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닌 학생들도 합격하기 어렵다는 시험에 평북 의주 농업 학교에 재학중인 내가 들어가려고 마음을 먹었으니 얼마나 열심히 준비를 해야 했겠는가.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나는 신의주에 있는 새 책이 너무 비싸다고 느껴 돈을 아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중국 안동현 도둑거리까지 가서 헌책을 사왔다. 그것도 차만 타면 두 시간에 왕복하여 사올 수 있는 책을, 걷고 배타고 하여 왕복 열두 시간만에 사온 것이다. 그러고도 책을 좀 싸게 샀다고 좋아라고 돌아왔으니 나도 그때는 돈보다 시간이 더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바보였다.
결혼식은 밤에 올리자
돈 아끼려 시간을 낭비하는 일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다. 그것은 관혼상제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나는 관혼상제에 속하는 행사에 참석한 일이 나이 구십 평생 동안 손에 꼽을 정도인 사람이다.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께서 몸이 약한 나를 걱정하여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못 가게 하신 것이 내 그런 습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내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그런 자리에 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관혼상제에 들이는 시간으로 더 유용한 일들을 많이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관혼상제에 시간과 돈을 너무 낭비하고 있다.
1953년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면서 나는 미국 사람들의 생활 습관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이들은 결혼식을 주로 밤에 했다. 이것은 일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친척들끼리만 모여서 간단히 예식을 치르는 그이들에 견주어 대낮에 결혼식 하면서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을 다 오라고 해서 폐를 끼치는 한국 사람들은 너무 시간 아까운 줄을 모르는 듯하다. 사람이 백 년을 산다고 칠 때, 미국 사람들은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여 삼백 년 산 만큼의 일을 하고 죽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명의 이기도 덜 이용하는 데다가 가치 없는 일에 시간을 쓰느라 오십 년 산 만큼밖에 못 살고 죽는 거 아닌가.
미국 사람들이 밤에 결혼식 하는 것을 보고 돌아온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결혼식을 밤에 하라는 제안을 했다. 그런 요지의 강연도 하고 글도 썼다. 그러는 나를 보고 다들 미쳤다고 했다. 청첩장을 받고도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으면 욕을 했다. 그렇지만 청첩장은 거의 날이면 날마다 날아오는데 욕 안 얻어먹겠다고 대낮에 환자를 놔두고 결혼식장에 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한번은 어떤 의사의 딸 청첩장이 날아들었는데 식 올리는 시간이 밤으로 잡혀 있었다. 보수적인 그 양반이 어떻게 그런 혁신적인 결정을 내렸는지 하도 궁금하여 내가 알아보았다. 사정인즉, 그 양반의 사위 될 사람이 당시 연세대총장인 백낙준 씨가 소개해 준 남자였다는데, 신랑, 신부 될 사람들이 백낙준 선생에게 찾아가 주례 서 줄 것을 부탁하자 그이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나 결혼할 때에도 밤에 식 올렸지. 낮에 안 했네. 낮에 식을 올리겠다면 나는 주례 못 해주겠네.”
하는 수 없이 그이들은 백낙준 씨 주례를 받으려고 밤에 결혼하기로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며칠 뒤 우연히 백낙준 선생을 뵙게 되었다. 나는 선생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정말 두 분은 그 옛날에 결혼식을 밤에 하셨습니까?”
“아, 그럼요. 미국 있을 때 밤에 식을 올렸습니다.”
나는 그때 '이분은 정말 선각자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말로 백 번 떠드는 것보다 한 번 실천하는 일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권해도 따르지 않던 그 일을 백낙준 씨는 몸소 실천해 보임으로써 여러 사람에게 파급시킨 것 아니겠는가?
그해 유해 봉환식에도 가지 않았다
장례식을 놓고는 할 말이 많다. 미국 사람들은 장례식도 딱 두 시간이면 다 끝내고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도 사흘이면 상을 치른다. 우리나라의 형편은 어떠한가? 보통 사흘장이고, 웬만큼 돈이 있다는 사람들은 오일장으로 자신들의 돈 있음과 권력 있음을 과시한다.
내가 안과 수련의를 거치던 시절에도 내 동료들은 누가 돌아가셨다, 누가 아프시다 하면 모든 일을 당장 때려치우고 그 자리에 갔고, 또 그래야 옳은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거 저런 거 다 예의 차리고 참석하다간 언제 공부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러지 못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공부해야 했던 그때에 내가 남들처럼 여기저기 참석하는 데에 시간을 보냈다면 나는 안과 의사가 되지 못했을 터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야 친척이 많지 않고 또 식구들이 이해심이 많아서 그럴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자기도 꼭 가고 싶어 가는 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팔남매의 둘째인 나도 참석하기로 들자면야 행사는 한도 끝도 없게 많았고 우리 집안 친척들의 행사도 누구집 못지 않게 자주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 자리에 가보지 못했다. 더 중요한 공부를 위해 불참했다는 것을 할아버지가 이해하시리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요즘도 그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얼마 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서재필 박사의 유해 봉환식이 있을 때에도 나는 가지 않았다.
최근에 일본에서 온 내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일본에는 백 퍼센트 화장을 해서 뼛가루를 바다에 뿌려버리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화장이 불효니 아니니 쑥덕거리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일본에서는 교수나 변호사와 같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화장을 해서 어디에 보관하는 것도 너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그 화장한 뼈를 바다에 뿌리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망 사실은 한 달 뒤에 알릴 것!
나는 미리 만들어둔 내 유서에 이렇게 써 놓았다.
시체 중에서 조직 또는 장기를, 다른 환자의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적출한 후 나머지 시체는 병리학 또는 해부학 교실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의과 대학에 제공할 것.
위와 같이 할 수 없을 때에는 사후 24시간 이내에 화장 또는 수장을 한다. 만약 법적으로 화장 또는 수장이 불가능할 때에는 가장 가까운 공동 묘지에 매장한다. 단, 매장할 때에는 새 옷으로 갈아 입히지 말고, 입었던 옷 그대로 값이 싼 널(관)에 넣어 최소 면적의 땅에 매장한다. 현 거주지로부터 100킬로미터 밖에서 사망하였을 때에는 가급적 현장에서 위와 같은 방법으로 처리한다. 여행 도중 바다나 강물에 익사하였을 때에는 수장으로 삼고, 시체를 찾아내지 말 것.
죽은 지 1개월이 지난 후에 가족, 친척, 친구에게 사망 사실을 점차 알릴 것. 만일 매장이 되었을 경우에는 화장한 것과 같은 경우로 알고, 누구에게나 묘지의 소재지를 알리지 말 것. 화장을 하였을 때, 남은 재를 몽땅 버리고, 조금이라도 어떤 곳에 남겨두지 말 것.
이 유서는 1987년 미국에 있을 때 만든 것이다.
내 유서를 읽은 어떤 친지는 내 자손들이나 다른 후세인들에게 내가 한 일의 의미를 알리고 그것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라도 묘지는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럴 돈이 있다면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과 상자 아홉 개로 침대를 만들고
이처럼 시간을 아끼느라 행했던 많은 일들 때문에 당했던 비웃음은 이루 말로 다 할 수도 없다. 1954년 미국에서 돌아온 뒤 곧바로 했던 집안 개조 때문에 나는 많은 말들을 들어야 했다.
내가 미국식 집 구조에서 본 것은 합리와 편리였다. 그이들은 침대라는 것을 방에다 들여놓아 아침-저녁으로 이불 갤 필요가 없게 해놓았고 수세식 변소를 집안에 두어 볼 일 보느라 변소 때문에 집밖으로 나가는 시간을 절약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 구조가 매우 편리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아이들 방에 사과 상자 아홉 개를 가지런히 놓고 그 위에 이불을 깔아 침대식으로 만들어 놓고 절대로 개지 못하게 했다. 또 변소를 방안으로 들이고, 부엌에서 수돗물이 나오도록 개조했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 구멍 하나를 뚫어 음식을 그 사이로 나올 수 있도록 만든 것도 그이들의 집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요즘만 해도 너무나 당연시되는 이런 일들을 처음으로 했다는 이유로, 아내는 동네 창피하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고, 친구 부부는 부엌이 마치 중국 호떡 굽는 부엌 같다고 비웃었다. 중국 호떡이 아니라 개떡 굽는 부엌 같으면 어떤가. 나는 내 생명과 같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어떤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
화장실에 들여놓은 가스 레인지
지금도 내가 주로 시간을 보내는 우리 집 이층에는 화장실 안에 가스 레인지와 식기들이 있다. 나는 주로 이층에서 아침, 점심을 스스로 만들어 먹고 저녁만 아래층 둘째아들 내외와 같이 하는데, 이층에는 부엌이 따로 없어서 물을 편하게 쓸 수 있는 화장실에 간이 싱크대와 가스 레인지 등을 놓아야 편리하기 때문이다. 한번만 생각해 보면 이렇게 배치해 놓은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는 일인데 대개들 집안을 둘러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니 내가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간이 싱크대 위에는 그 동안 내가 사다먹은 요구르트 병이나 두유팩 따위가 가득 쌓여 있다. 요즘 그런 음료의 용기는 내용물 먹고 부담없이 버리기에는 너무나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재활용을 위해 그렇게 모아 둔다. 그뿐만 아니라 입만 한번 닦은 휴지는 화장실에서 다시 쓰기 위해 모아 놓고, 아무리 작은 종이 조각이라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잘 분리해 모아 둔다. 그런 것들을 보고 사람들은 '저렇게 종이 조각 하나까지 모아둘 정도이니 물건 하나 살 때도 이만저만 까다롭게 흥정하지 않을 거다' 하는 엉뚱한 오해를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상거래를 할 때 에누리없이 사는 것이 내 오랜 인생 지침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숫대야 하나를 살 때에도 장사와 이러쿵저러쿵 흥정을 하여 물건값을 단 십 원이라도 깎지 않으면 집안 경제가 당장 망하기라도 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나 보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십 원, 이십 원 아끼느라 버리는 시간은 다 어떡하고? 꼭 받을 값만 정가로 매겨 놓고 팔면 사는 사람도 깎을 생각을 않고 서로 시간 절약하여 좋을 터인데 참으로 딱한 일이다.
옛날에는 심지어 세금을 걷는 세무서에서조차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해방 직후, 세금 낼 때가 되었을 때에 나는 '제대로 세금 내어 나라 살림을 튼실하게 꾸려 나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아주 정직하게 납세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가 재벌급을 제쳐놓고 서울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낸 사람이 되었다.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납세 신고를 속여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는 것은 세금을 납부한 뒤에 세무서에서 제멋대로 매긴 '인정 과세'가 다시 날아들어 어리둥절해 하면서 알게 되었다. 새로운 과세 쪽지가 날아든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사람들이 제대로 세금을 안 내니 세무서 쪽에서도 국민들을 못 믿고 있다는 뜻 아닌가? 정부와 국민 사이에 이런 가장 기본적인 믿음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또다시 고지서를 발부하고 다시 걷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시간 낭비가 어디 있느냐 말이다.
팩시밀리는 놔두고 얻다가 쓰냐?
말을 애매하게 하여 시간 낭비를 시키는 사람들도 나는 싫다. 예,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해주면 좋을 것을 이리 빙빙, 저리 빙빙 돌려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게 한다. 그리하여 그 사람 말의 진정한 뜻을 알려면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약속을 하더라도 미리미리 해서 서로 자신의 스케줄에 영향이 없도록 시간을 맞추어야 하는데 하루나 이틀 전에 불쑥 말을 해놓고 무작정 찾아온다던가 하는 일들은 정말 몹쓸 습관이다. 미국에서는 1년이나 2년 뒤의 연극 공연을 미리 예약한다거나 레스토랑에 전화로 먼저 예약을 하고 식사하러 가는 일들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가까운 친지의 급작스런 방문은 또 그렇다고 치자. 시간 관리를 가장 잘 해야 할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그런 기본적인 예의와 도리를 모른다.
작년 한글날 무렵의 일이다. 한 방송국에서 어느 날 전화를 걸어 날마다 한 시간씩 방송국에 나와 인터뷰 녹음을 해달라고 했다. 나와 한 인터뷰를 가지고 한글날 특집 방송을 만들겠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이들이 그 전화를 한 것은 나와달라는 날 닷새 전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한글날 특집 방송이면 꽤 중요한 것일 텐데, 적어도 몇 주 전에는 전화를 했어야 되는 것 아니오? 그리고 나 같은 늙은이가 그 방송에 나가서 말을 하면 말소리가 똑똑치 못해 청취자들이 잘 못 알아들을 것이니 내가 쓴 책이나 자료들을 읽어보시고 원고를 만들어 아나운서가 발표를 하게 하시오.”
그러나 그이들은 막무가내였다. 꼭 내가 나와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응하기로 한 나는 며칠 전에라도 내게 할 질문들을 적어서 팩시밀리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그래야 요령 있는 답변을 준비해 갈 수 있을 거 아닌가. 하지만 그이들은 막무가내로 나와달라고 하여 결국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나가 인터뷰에 응해야 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은 '문자 생활을 못하는 이들'이라고 여긴다. 우리에게는 의사를 확실히 전달할 수 있는 문자가 있고 그 문자를 또렷이 전해주는 팩시밀리라는 문명의 이기가 있는데, 왜 그것을 사용할 생각을 않는 것일까? 그런 합리적인 사전 준비는 소홀히 하면서 마냥 서두르기만 하는 그이들의 일하는 방식이 나는 너무나 안타깝다.
고집쟁이라는 말이 좋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시간을 절약해라, 합리적으로 생활해라, 세벌식 한글 자판을 써라 하고 잔소리를 해대는 내게는 '고집불통'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내게 이 말이 붙게 된 데에는 유래가 있다. 오래 전에 한국일보사에서 고집쟁이 열 명을 뽑아 매주일마다 한 사람씩 신문에 소개했다. 그때 1위가 이승만, 3위가 최현배, 내가 6위로 뽑혔던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괴팍한 분위기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는 이 말이 나는 좋다. 왜냐하면, 고집불통이란 말은 신념을 가지고 자기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붙일 수 있는 말이고, 나는 스스로 그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는 그 말이 '너는 참 열심히 살았다'고 칭찬하는 훈장과 다름없게 들린다.